Chapter 61
시간이 얼마나 지났을까.
못해도 한 시간은 지나지 않았을까?
나를 위해 힘써준 릴리스에게 고마운 마음을 담아 그녀를 쓰다듬은 것인데…
오히려 내가 만족하고 있었다.
쓰다듬을 때 배시시 웃는 릴리스가 너무 귀여운 나머지 시선을 떼지 못하겠다.
‘아, 치유된다….’
생명력이 빨리며 느꼈던 서늘함은 릴리스의 온기로 진작에 사라졌다.
…애초에 심하게 어지럽거나 하지도 않았고.
‘…나 진짜 뭐 있나? 생명력이 많다고 눈에 보이다니….’
분명 릴리스는 별것 아니라고 말하긴 했지만,
나는 내 가슴에서 흘러나오는 빛을 본 릴리스의 표정을 잊지 않았다.
명백한 경악의 시선.
그 반응을 보니 절대 흔한 증상이 아니었다.
하지만 일단은 릴리스가 가만히 있는 것을 보아하니 내게 해가 될 문제는 없어 보였다.
그래도 궁금하긴 했으니 릴리스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은근히 질문을 던졌다.
“저는 그럼 생명력이 많은 체질인 거예요?”
“맞아.”
“그럼 제가 자연치유력이 좋은 것도 그 때문인가요?”
“아마도. 생명력은 신체 자체의 내구도에도 영향을 미치니까.”
오, 그럼 꽤나 좋은 것 아닌가?
무엇보다 생명력이 많다는 사실은….
“다행이네요.”
“응?”
릴리스가 갑자기 무슨 말이냐는 듯 나를 바라본다.
“이런 체질이라 다행이라고요.”
“왜?”
“적어도 사랑하는 사람 굶길 일은 없잖아요?”
“피…. 겨우 그런 이유로?”
“겨우라뇨. 이게 얼마나 중요한 일인데.”
내가 죽기 직전이라도 릴리스 배는 채워드려야지, 암암.
무언가를 잠시 고민하던 릴리스는 툭 던지듯 말했다.
“체질때문만은 아닐 수도 있어.”
“네?”
“내가 너한테 준 황금의 벌꿀술. 그게 사실 좀 대단한 물건이거든.”
매 식사마다 먹은 그걸 말하는 건가?
달달하면서 끝맛도 깔끔해서 내가 푹 빠진 음료다.
“평범한 사람들도 그걸 마시면 일시적으로 몸이 매우 튼튼해져서…. 음속 돌파도 버틸 수 있어져.”
“…예?”
아니 지금까지 제가 매번 마셔왔던 게 그런 엄청난 물건이었다고요?
당황해서 바라보자 릴리스가 손사래를 쳤다.
“물론 너한테 준 건 희석한 거라 그 정도 효과는 없을 테지만…. 그래도 생명력을 보충해주는 건 가능하지.”
“…제가 지금까지 먹은 것들 중에서 더 알아야 할게 있을까요?”
그러자 릴리스가 미소 지으며 답하길.
“자라, 장어, 복분자.”
“네? 그건 대륙에도 있는 재료들 아닌가요?”
나름 평범한 재료들이라고 생각했는데 무슨 숨겨진 비밀이라도 있는 걸까?
“그것들도 몸에 좋은 거야. 잘 챙겨먹어야 해.”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릴리스가 그렇다면 그런 거겠지.
애초에 릴리스가 해준 음식들은 전부 맛있어서 가릴 것도 없었다.
“그럼 이제 슬슬 점심을 먹어볼까?”
벌써 시간이 그렇게 됐나?
고개만 돌려 시계를 보니 점심 때였다.
그럼 내가 잠만 두 세 시간을 잤단 말인가.
‘많이도 잤네….’
낮잠을 이렇게 많이 자보는 건 처음이었다.
하지만 악몽을 꿔서 그런지 딱히 피로가 풀린 것 같지는 않았다.
‘밥 먹고 다시 자도 될려나..?’
“점심 뭐 먹을래?”
흠, 밥 먹고 얼마 안 돼서 바로 눕는 바람에 소화가-
꼬르륵
…잘 됐네.
생명력을 많이 빨려서 그런지 아침보다 더 배고픈 상태였다.
“좀 든든하게 먹어야겠지? 그럼 고기류로 가는 게 나을려나…”
고개를 갸웃거리며 메뉴를 고민하던 릴리스는 이내 손뼉을 치며 말했다.
“아! 그걸 먹으면 되겠네.”
“뭔데요?”
“후후훗, 비밀~ 그래도 맛있게 해줄테니까 기대하고 있어.”
짓꿎게 웃으며 내 코를 톡 두드린 릴리스는 몸을 일으켰다.
따뜻한 온기와 부드러움이 사라진 품이 서늘하다고 생각했지만,
쪽
그런 내 마음을 아는지, 금방 다가와 입을 맞춰주는 릴리스.
“조금만 기다려. 재료 가져올게.”
“네….”
릴리스가 휘리릭 사라졌다.
빈 방에서 멍하니 천장만을 바라보던 나는 방금 전의 일을 다시 떠올렸다.
꿈에서 들은 목소리.
떠올리기만 해도 뼛속까지 차가워지는 것 같았다.
이어진 찬란한 빛.
‘…분명 익숙했어.’
항상 내 곁에 있었던 것만 같은 익숙함.
릴리스가 말했던 벌꿀술에 담긴 것이라기에는 너무도 친근한 것이었다.
내 본연의 것.
분명한 내 것이었다.
나는 옅은 실소를 지었다.
‘마력은 쥐뿔도 없는데 생명력만은 넘쳐나다니… 이거 알고 보니까 생명력이 너무 많아서 마력이 들어올 자리가 없는 거 아냐?’
그래도 고맙긴 했다.
이런 생명력 덕분에 내가 살아남을 수 있었으니까.
‘…그러고 보니 심장이 찔렸을 때도 릴리스가 회복 마법으로 치료했다고 했지?’
생각해보면 그때 릴리스는 드림랜드에서 힘을 많이 쓴 이후였다.
권능을 쓰기에는 버거웠을터.
‘그럼 정말 회복 마법으로 심장을 치료한 거야?’
내가 생각해봐도 엄청난 양인 것 같다.
죽다 살아났음에도 흘러넘칠 양의 생명력이라니…
그러다 문득 떠올린 생각.
‘…생명력은 어디다 써먹을 방법이 없나?’
만약 생명력만으로 마법을 사용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평범한 인간이라면 미친 소리라 할 것이다.
수명과 직접적인 연관이 있는 생명력을 써서 마법이라니.
사치도 그런 사치가 없다.
하지만 나는 그런 예감이 들었다.
내 생명력이 마치….. 계속 늘어나는 것만 같다고.
생명력의 총량은 늘어나지 않는다.
그건 상식이자 법칙이라고 알고 있다.
생명력은 이미 소모한 것을 ‘회복’하는 것이지 원래의 양보다 ‘증가’ 시킬 수는 없다고.
그러나 나는 이미 생명력이 넘쳐서 눈으로 볼 수 있을 정도로 구체화 되었다.
매일 릴리스에게 생명력을 빨리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만약 내 생명력이….
‘무한하다면…?’
…….피식.
“에이, 설마….”
너무 갔나?
생명력이 무한하단 소리는 이론상 수명도 무한하는 뜻.
‘말도 안되는 소리지.’
나는 앞선 생각을 고히 접어 머릿속 한 구석에 처박아 두었다.
‘그나저나 릴리스는 언제 오려나-‘
“다녀왔어!”
갑자기 허공에서 퐁 나타난 릴리스.
문제는 그 위치가 누워있던 바로 내 위라는 것이다.
중력은 누구에게나 공평하게 작용되었고, 릴리스는 내 위로 떨어졌다.
폭신
‘어라..? 왜 어두워졌지?’
눈을 떠도 감았을 때와 똑같이 어둠만이 보였다.
무언가가 내 눈을 가리고 있었다.
답답한 기분에 그것을 치우려 손을 들어-
물컹~
“…?”
주물주물…
상상 이상으로 부드러운 무언가가 손에 잡혔다.
압도적인 부드러움, 그러면서도 형태를 유지하는 탄력…..어?
“….!!!!”
그게 무엇인지 알아챈 나는 황급히 손을 때어냈다.
“리리리리, 릴리스!!”
“푸훗, 언제 알아채나 했는데 좀 느리네?”
몸을 일으킨 릴리스는 두 손을 교차해 자신의 몸을 감쌌다.
“어머, 변태. 어딜 만지는 거야?”
“그….그으…!”
미치겠다.
부끄러워서 미치겠고,
그걸 놀리고 있는 릴리스 때문에 미치겠고,
또 그 감촉을 다시 느껴보고 싶다고 아우성 치는 본능 때문에 미치겠다.
거기다가 벌떡 튀어오르는 분신 때문에 정말 미칠 것 같았다.
“뭘 그리 부끄러워 하고 그래?”
“부, 부끄러워 하는 게 정상이거든요?!”
베개 하나를 들어올려 내 얼굴을 덮었다.
그리고 소리 없는 함성을 내지른다.
‘쥐구멍…. 쥐구멍이 필요해!’
그런데 그런 내 옆에 인기척이 났다.
내 곁으로 다가온 릴리스가 내 귓가에 속삭인다.
“또 만질래?”
“?!”
놀라서 몸을 일으키려던 것을 릴리스가 꾹 눌러서 저지한다.
“그렇게 부끄러워할 필요 없다니까?”
릴리스는 내 얼굴을 덮고 있던 베개를 옆으로 치웠다.
그러자 내 시야에 거대한 무언가가 들어온다.
“장난치지-”
“어머, 장난 아닌데?”
“….네헤?”
너무 놀란 나머지 헛바람이 섞여 나왔다.
커다란 언덕 너머로 고개를 내민 릴리스가 미소지으며 말했다.
“난 네 거야. 이미 도장도 찐하게 찍었잖아. 내 마음은 물론, 내 몸까지도…. 저언부 네 거야. 그러니까 부끄러워하지 않아도 돼. 원한다면 마음껏 만져도 좋아.”
눈꺼풀이 파르르 떨렸다.
눈앞에 드리워진 골짜기에 절로 침이 고인다.
탐스러운 두 열매.
어느새 릴리스는 나를 잡고 있던 손을 놓고 있었다.
그리고 나를 얌전히 기다리고 있었다.
고인 침을 꿀꺽 삼킨 나는 천천히 손을 들어올렸다.
마치 준비를 하듯 눈을 감은 릴리스지만….
“…무리.”
“응- 꺄악!”
릴리스의 허리를 감싸서 몸을 돌린다.
위 아래가 역전되고 내가 위로 올라왔다.
그리고 곧장 몸을 일으켜 화장실로 뛰쳐간다.
문을 쾅 닫고 기대어 숨을 고른다.
가슴에 손을 올려보니 불규칙적으로 쿵쿵거리는 심장.
나는 최대한 스스로를 진정시키기 위해 애썼다.
찬물로 세수를 하자 달아오른 얼굴이 풀어졌고,
변기에 앉아 소변을 보니 그나마 진정이 되-
나는 문득 시선을 멈췄다.
변기 바로 옆에 배치된 쓰레기통.
릴리스의 부탁에 따라 내가 ‘뒷처리’를 하는 그곳.
슬그머니 그 뚜껑을 올려본 나는 헛바람을 들이켰다.
‘…어, 없어..?’
분명 아침에 두 번이나….아.
떠오른 것은 화장실 문이 닫히기 전,
여기에 시선을 준 릴리스.
심지어 나올 때 만족스런 표정을 지었던…
‘…진심?’
툭
차가운 감촉에 시선을 돌려보자 변기 앞부분에 무언가가 닿았다.
‘아…..’
제발.
—-
화장실에서 나오자 릴리스가 웃으며 반겨주었다.
“점심 먹자.”
“…네.”
아무 일 없었다는 듯이 웃는 릴리스가 살짝은 원망스러웠지만, 식탁에 올라온 음식은 내 시선을 끌기 충분했다.
“…스테이크?”
그것도 상당한 크기를 자랑하는 녀석이었다.
“빨린 게 많으니까 든든하게 먹어야지.”
이어서 은근한 목소리로 말하는 릴리스.
“…생명력도…. 그것도….”
“릴리스 제발….”
“후훗, 먹자!”
스테이크를 한 점 썰어서 입에 넣자마자 나는 고개를 푹 떨궜다.
“왜 그래? 맛 없어?”
그럴리가.
맛있었다.
너무 맛있었다.
부드러운 살점을 씹자마자 육즙이 터져나오며 풍미가 입안을 가득 메웠다.
적절한 양의 소스가 잡내를 잡아줘서 온전한 고기맛만 났다.
저번에 갔던 고급 식당에서 먹은 스테이크도 엄청 맛있다고 생각했건만,
이 스테이크는 그것과 비교하기에는 격이 다른 것 같았다.
내 속마음도 모르고 계속 본능을 건드리는 릴리스가 살짝 원망스러웠으나 이걸 한 입 먹으니 그런 마음이 싹 사라졌다.
‘그래, 약혼까지 했는데 뭐. 조금 더 긴밀해지고 싶을 수도 있지.’
내가 이해하기로 했다.
‘그래도 선 넘는 건 조금 뒤로 미루자….’
뭐랄까…. 릴리스와 한 번 선을 넘기 시작하면 돌이킬 수 없을 것 같았다.
하루 종일 붙어만 있을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
그래도….
이 정도는 괜찮지 않을까?
“릴리스.”
릴리스는 옆에서 고기를 썰다 말고 나를 바라보았다.
“응?”
“…고기가 좀 질기지 않아요?”
“뭐어?!”
놀란 릴리스가 곧장 내 고기를 먹어보았다.
“…응? 부드럽기만 한데..?”
“아뇨, 질겨요.”
“아니….”
나는 아예 나이프와 포크를 내려놓았다.
그러자 울상을 짓는 릴리스.
애써 만들어주었는데 내가 안 먹는다 선언을 하니 속상할만 했다.
하지만 나는 다른 것을 노리고 있었다.
“근데 맛있어요.”
“…응?”
“저도 먹고 싶어요. 하지만 질겨서 턱이 아파요.”
멍하니 내 말만 듣고 있는 릴리스.
“그러니까 그…. 릴리스가 먹여주면 안 될까요?”
릴리스는 고개를 갸우뚱했다.
“내가 먹여준다고 고기가 안 질겨지는 건 아니잖아?”
“아뇨 제가 말한 건….”
나는 손을 뻗어 릴리스의 턱을 감쌌다.
그리고 엄지로 그녀의 입술을 쓸어내었다.
내 행동의 의미를 잠시 고민하던 릴리스는…
땡그랑!
식기를 떨어뜨렸다.
“…지, 진짜?”
“물론 릴리스가 싫으시다면 안 해도-”
“아니! 좋아! 너무 좋아!”
해맑게 웃으며 감싼 내 손에 볼을 비비는 릴리스.
저렇게 좋아하는 모습을 보니 잘 생각한 것 같았다.
자리에서 벌떡 일어난 릴리스는 내게 뒤로 빠지라는 손짓을 했다.
의자를 뒤로 살짝 물리자 적당한 공간이 생겼다.
릴리스는 두 발을 한쪽으로 몰아서 내 허벅지 위에 앉았다.
“무겁진 않아?”
“네, 괜찮아요.”
“…그럼….”
릴리스는 내 손에 있던 식기를 가져가 앞에 있는 스테이크를 한 점 썰어내었다.
그리고 잠시 머뭇거리더니, 그 고깃조각을 입에 넣었다.
“우물우물…”
몇 번 씹은 릴리스는 식기를 내려놓고 몸을 살짝 돌려 얼굴을 내게로 향했다.
내 입술을 톡톡 두드리는 릴리스.
입을 아~ 하며 벌리자 릴리스가 입을 겹쳐왔다.
조각난 고깃덩어리들이 입으로 들어왔다.
나는 건네 받은 덩어리들을 우물우물 씹었다.
솔직히 고기의 맛은 잘 모르겠다.
육즙이나 소스 따위는 릴리스가 씹는 단계에서 대부분 빠져나갔다.
하지만 나는 오히려 더 맛있다고 느꼈다.
육즙과 소스 대신 릴리스의 타액이 묻어있었기 때문에.
저번에도 이런 식으로 릴리스가 음식을 건넨 적은 있었지만 그때는 입으로 물어다 주기만 했지 씹지는 않았으니.
나는 그 달콤한 타액을 음미하며 고개를 씹었고, 이내 삼켰다.
“어때..?”
“더 맛있어졌어요.”
나는 릴리스가 내려놓은 식기를 잡았다.
“릴리스도 먹어볼래요?”
“…응.”
릴리스도 부끄러운지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가 했던 것처럼 고기를 잘라 씹는 일련의 과정이 지나고.
릴리스와 입을 겹쳐 고기를 넘겨준다.
“우물우물…..꿀꺽.”
“어때요?”
“…나도 맛있어. 또 먹을래?”
“네.”
그 뒤로도 우리는 서로에게 고기를 나눠주었다.
시간은 보통 식사시간에 세 배나 걸렸지만 뭐 어떤가, 지금은 방학이고 우리의 점심시간은 길고 길었다.
식사가 끝나고 달아오른 분위기를 식히기 위해 산책을 제안했고 릴리스는 흔쾌히 받아들였다.
이제는 익숙해진 팔짱을 끼고 공원을 나란히 걸어간다.
이런저런 잡담이 오가던 중, 릴리스가 진지한 말투로 말했다.
“아서. 거짓 없이 대답해줄 수 있어?”
“그럼요. 뭔데요?”
릴리스는 나를 멈춰세우더니 몸을 돌려 마주보게 만들었다.
릴리스의 까만 눈동자에 내 얼굴이 비쳐보인다.
이어서 릴리스가 말하길.
“너, 네크로노미콘 읽었어?”
아, 맞다.
[!– Slider main container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