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81
대니스의대련신청을받은나는한층답답해진마음에구석에찌그러져있었다.
레티는선배들이불러서끌려갔고,곁에남아있는건릴리스뿐이었다.
-하아…필참이고뭐고빨리나가고싶네요.
-조금만버텨.이제막바지같으니까.
릴리스의말에위안을얻은나는몇잔째인지모르는무알콜칵테일을홀짝였다.
그런데그때.
“아서!”
우렁찬목소리가귓가를때렸다.
분명뒤에서들려온목소리였지만,얼굴을보지않아도누군지알수있었다.
“안녕,루크.”
만면에미소를가득띄우고다가온루크는내어깨를강하게두드렸다.
‘…아파.’
“방학때잠깐마주친걸제외하면꽤나오랜만이다.잘지냈나?”
“나름대로.너는?”
“난잘못지냈다.”
“…엥?네가?”
전혀예상치못한대답에어이가없어서되묻자,루크는지친듯한숨을내쉬며말했다.
“방학동안이리저리끌려다니며크고작은파티에참석했다.너무지치는일이었다.”
“저런,너도파티는별로야?”
“너도라고말하는건아서도파티를싫어하나?”
“어,이답답한분위기가별로야.”
“알것같다.거기다돈낭비,시간낭비…이렇게낭비만하는자리가뭐가좋다고그렇게열어대는지알수가없다.”
어라,의외로대화가되네?
솔직히조금부담스럽다고생각하고있었는데,루크는내가알던귀족의이미지와는상당히달랐다.
“아서,너는신년축제에참석했었나?”
“응.참석했었지.그건왜?”
내말에루크가눈을반짝였다.
“그,그럼해가넘어갈때의폭죽도봤나?”
“봤어.”
“어땠지?”
“음…예뻤어.화려하고.”
루크는한숨을푹내쉬었다.
“나도정말보고싶었건만…”
“어…보고싶으면보면되지않아?”
“그게그렇게쉬운일이아니다.”
잠시말을머뭇거리던루크는이내,
“나는그축제당시파티에참석해있었다.”
“앗…”
루크가너무불쌍하게느껴졌다.
귀족이라고딱히좋은것만있는건아니구나…
심지어블레이즈같은대귀족급이면더욱바쁜모양이다.
“매년폭죽은쏴왔지만이번폭죽은특별히폭약을더첨가한특제폭죽이라고해서잔뜩기대하고있었는데…너무아쉬웠다.”
“저런,내년을노리…아.”
생각해보니내년에우리는4학년이된다.
4학년은이른바졸업반으로가장치열하게공부할학년이었다.
환영회자료에보면4학년은특별히필참인원을만들지않는다고한다.
워낙에바쁜사람들이다이거지.
지금이홀에도보라색4학년브로치는거의보이지않았다.
그렇게바빠질4학년인데축제는…음…
“…졸업하고나서가야겠지…”
힘없이중얼거리는루크는드림랜드에서봤던그모습과는사뭇달랐다.
‘그때는마치파괴의신처럼보였는데.지금은평범한동급생같네.’
나는머뭇거리며그의어깨를토닥여주었다.
“어…축제가그것만있는건아니잖아.탄신일이라던가.그런거라도참여하면되지.”
“…부디그랬으면좋겠다.”
우울하게중얼거리던루크는돌연고개를들었다.
“그러고보니,아서.축제에는혼자간건가?”
“어…아니?”
“그때봤던여성분과함께?”
“…맞아.”
그러자언제풀죽었냐는듯이내어깨를강하게두드리는루크.
“축제데이트라니,로맨틱하군!”
-로맨틱했지.마지막프러포즈까지완벽하게.
갑자기끼어든릴리스의말에그때의기억이떠올라얼굴이달아올랐다.
“어어?얼굴이빨갛다,아서.”
“읏…아무것도아니야.”
나를빤히쳐다보던루크는무언가를깨달았다는듯이고개를끄덕였다.
“그렇군.하긴뭐약혼까지한사이니까그럴수있다.”
“…뭘생각한거야?”
“나는이해할수있다,아서.혈기왕성한나이대니까말이야.하지만아서…”
루크는목소리를낮추더니,누가들을까경계하듯주변을두리번거리고말하길,
“우리나이대에는피임은꼭해야한다고들었다.아이가생기면골치아프-”
“아니야!안했어!!”
물론할뻔하긴했-
다시금그때의장면이떠올랐다.
릴리스위로올라타,마치덮친자세가되어버렸던그때.
폭죽의빛으로이리저리빛나는릴리스의뽀얀얼굴.
코끝을간지럽히던릴리스의달콤한숨결-
“얼굴이빨갛다,아서.굳이말하고싶지않으면안해도된다.”
“안했다고.”
“나는너의비밀을꼭지키겠다.”
“아니라니까?”
“그게우정이라는거니까.”
“너내말안듣고있지.”
나는몰려오는두통에머리를부여잡았다.
‘대화가되긴커녕,벽에다대고말하는기분이네…’
-푸훕…
머릿속에울리는웃음소리에발치를내려다보자입을가리고웃음을참고있는릴리스가보였다.
-…고양이는입안가리거든요.
-너무웃긴걸어떡해.
남일이라고…아니,따지고보면남일도아니잖아.
정말너무하시네.
릴리스가살짝원망스러워지려던찰나,
“아서,물어보고싶은게있다.”
루크가진지한얼굴로말했다.
물론늘진지하던루크지만이번에는뭔가달랐다.
“뭔데?”
심호흡을한루크가말하길,
“고백은누가먼저했지?”
“……”
“……”
“…..?”
내가뭘잘못들었나?
지금루크가고백을누가먼저했냐고물어본것같은데.
루크가그런질문을할리가없-
“고백은누가먼저했냐고물었다.”
“……그건왜?”
간신히입을벌려대답하자루크가빛나는눈으로답했다.
“궁금하니까!”
“…허.”
어이가없어서그냥얼버무리려던나는문득,
‘…그러고보니누가먼저했더라?’
갑자기궁금해졌다.
맨처음사랑한다는말을한건…
-릴리스.
-사랑해요.
…나구나.
아니지,이건가족으로서사랑한다는말이었잖아.
연인으로서의고백은…
-사랑해요,릴리스.
…이것도나네??
나생각보다엄청들이댄(?)편이었구나?
심지어프러포즈도두번이나내가먼저하지않았나?
확인사살하듯머릿속에꽂히는릴리스의말.
-뭘고민하고있어.당연히너지.
-…저생각보다엄청들이댄편이었군요?
-그걸이제알았어?내가얼마나참으려고노력했는데,그걸비집고들어와서고백했으면서…아직자각도없던거야?
…아예없었습니다만.
얼버무리려던나는너무나확실한상황이었기에그냥답해주기로했다.
“내가먼저했어.”
“오오!역시너는용기있는남자다!”
…용기?내가?
금시초문인데.
“고백할때는어떤기분이었지?”
“떨렸지.”
“거절당할까봐?”
“아니,나나상대방이나서로좋아하는건알고있었거든.”
“그럼어째서떨렸지?”
“…그러게?왜떨렸지?”
지금생각해보면꽤나가벼운것같기도…
아니다,가볍긴개뿔.
지금생각해봐도심장이터질것같구만.
성공 유무를 떠나서 고백이라는 건 상당히 부담스럽고 떨리는 일이었다.
“서로가좋아한다는건어떻게눈치챌수있었지?”
“어…그건완전히눈치로만알아챈건데.”
처음릴리스의눈에담긴감정을알아챘을때에는그저따뜻한감정이라생각했을뿐,그게어떤감정인지는모르고있었다.
하지만내가릴리스를바라보는눈이그것과같다는것을깨닫자,그감정이사랑이라는것을눈치챈것이다.
“음…눈치라.”
루크는턱을괴고진지하게고민하고있었다.
“그런데이런질문은갑자기왜하는거야?”
“말하지않았나,궁금해서다.”
“아니아니,단순히궁금하다고해서그런반응이나오지는않거든?누구신경쓰이는사람이라도있는거야?”
움찔
정곡이찔린듯루크의몸이떨렸다.
‘엇…진짜였어?’
“…왜그런눈으로보는거지?”
“내가뭘.”
“마치시장통에서굴러다니는동전을본것같은눈이다.”
…그게도대체무슨눈이야?
그런데알것같았다.
다름아닌루크가이런쪽에관심을가지는것이다.
인식저해마법이통하지않을정도로눈치가없는루크가,
수련에만매진하느라머리까지근육으로가득찼다는소리를듣는루크가,
연애에관심을가진다고?
전혀매칭이되지않는것같다.
“루크,너도관심있는사람이생긴거야?”
“으음…관심이랄까…나도잘모르겠다.오히려그쪽이뭔가이상해서말이지.”
“상대방쪽이?”
“그래.”
도대체누구길래저루크가눈치를보게만든단말인가.
어지간히들이댄건가?
“으음,어쨌든고맙다,아서.도움이된것같다.”
“…딱히도움이된것같지는않은데.”
“아니다.정말많은도움이됐다.”
“…그래.네가그렇다면야뭐.”
내게손을흔든루크는다시파티속으로들어갔다.
뭔가를진지하게고민하는듯한표정으로.
-…루크가연애라니.도저히상상이가지않아요.
-그래?나는대충감이잡히는데.
-어,진짜요?
-응.상대방이누군지도알겠어.
-누군데요?
-그건대답못해줘.나도확실치는않아서.좀독특하다는것만알려줄게.
독특하다니,대체누구지?
고개를갸웃거리며고민하고있자니,
‘…칵테일을너무마셨나?’
화장실이가고싶어졌다.
화장실에 가서 릴리스와 놀며 시간이라도 보내야겠다.
홀의입구로향하려던그때.
“저,저기!”
“응?”
뒤를돌아보자어딘가익숙한밤색머리를한여자가내게빠른걸음으로다가오고있었다.
바로내앞에도달한여자는무릎을짚으며숨을몰아쉬었다.
매우힘들어보였다.
“어…괜찮으세요?”
그러자여자는말없이브로치를들어보였다.
노란색에금테가둘러진브로치.
“신입생?”
“허억…허억…네,이번에신입생으로들어온…허억…카리사라고해요….헥…말씀편하게하셔도좋아요.”
“나는-”
“알아요,3학년아서선배님이시죠?”
“어라?어떻게알았어?”
숨을한번크게내쉰카리사는몸을바로세웠다.
“저기억안나세요?”
“응?”
카리사의말에나는그녀를천천히훑어보았다.
이내손뼉을마주치며외쳤다.
“아,그때도서관에서그…”
“맞아요.기억해주셔서다행이에요.”
도서관에서사서쌤이소개시켜준책벌레신입생이었다.
안경을벗고드레스를입고있으니사람이완전히달라보였다.
밤색머리카락과눈이독특해서기억이났다.
그런데…
-도서관?
머릿속을찌르는듯한날카로운목소리.
-사서쌤이랑대화만했다며?
-맞아요.
-근데저년은누구야.
저년이라니…
어째여자만엮이면입이험해지는것같은데요…?
-사서쌤한테소개받은애예요.책많이읽는게저랑비슷해서신기하다고하신것뿐이라고요.
-…여자를소개받았단말이지?
아니,그게그렇게됩니까?
-릴리스.저얘이름방금알았어요.
-흐응…
추임새를보아하니단단히삐진것같았다.
빨리화장실에가서풀어주던가해야지.
“그래서무슨일이야?”
“아,선배.이번주말에시간있으세요?”
잠깐,저말은조금위험한-
-…아…서…?
망했다.
릴리스의목소리에생기가사라졌다.
자칫하다간눈앞에후배가증발해버릴수도있겠다.
그사태를막기위해나는빠르게입을열었다.
“아,대련신청하려는거야?”
“네.맞아요.”
-봐요.대련신청이었다니까요?
“미안, 늦었어.이미대련하기로다른신입생과약속했거든.”
“아…”
카리사는눈에띄게실망한표정을지었다.
“그럼이만.”
나는빠르게대화를마무리하고자리를뜰려고했다.
빨리사람없는곳으로가서릴리스의화를풀어줘야-
덥썩
누군가내손을붙잡았다.
“저,저기…”
돌아보니역시나카리사였다.
흘끗보니릴리스의눈이잡힌손을향하고있었다.
어째릴리스의눈에서붉은기운이흘러나오는것같은데…
“왜,뭔데?빨리좀말해줄래?”
“저…혹시그럼선배님대련에참관해도될까요?꼭좀보고싶어서…”
어어,얘왜이래?
말하나하나가오해를부르기딱좋았다.
-……
릴리스는더이상말을하지않았지만,그무언에서묻어나오는진득한감정에온몸에소름이돋는것같았다.
“그건알아서하고.미안하지만지금내가좀바쁘거든?이것좀놔줄래?”
“앗,네!”
손이풀리는즉시나는릴리스를잡아들고홀을달려나갔다.
바로근처에있는화장실을찾아낸나는그곳에들어가변기칸안으로뛰어들어갔다.
칸막이를치는즉시인간의모습으로돌아오는릴리스.
릴리스의얼굴에는아무런표정도나타나지않았다.
예상하고있던분노도,실망감도없다.
그저무미건조한표정.
하지만나는그표정이그어떤때보다무서웠다.
“아서.”
표정과마찬가지로무미건조한목소리.
“넵.”
“입벌려.”
“…네?”
예상치못한말에나도모르게반문이튀어나왔고,그러자릴리스는-
쿵!
나를벽으로밀어붙이며팔로나를가두었다.
“입.벌려.”
“…넵.”
무표정한릴리스가주는압박감은엄청났다.
나는릴리스의명령에따라입을벌렸다.
“턱들어.”
“?”
“들어.”
얌전히턱을들어올리자마치어미새에게먹이를얻어먹는새끼새같은모양새가되었다.
몸을가까이붙이며어미새의위치에자리잡는릴리스.
릴리스는천천히내입술을손가락으로쓸어내렸다.
“아서.”
“넵.”
“넌누구거야?”
“릴리스겁니다.”
“그렇지?”
“넵.”
“그런데왜다른여자가나를신경쓰게만들지?”
“릴리스걔는-”
“상관없어.”
“…네?”
“아까그인간이어떤년인지,어떻게만났는지상관없다고.그리고…”
말끝을흐린릴리스는천천히손을뻗어내뺨을쓸어내렸다.
“…네잘못이아닐수도있지.그래,잘못은그년들이했어.너는아무런잘못도없어.가엾은아서.”
쪽
릴리스는짧게입을맞췄다.
“하지만어쨌거나계속해서새로운인간들이네주변에생기는건사실이야.나는그게참…불쾌해.”
불쾌해라는말대신다른말이튀어나오려던것을간신히참아낸것같은느낌이든다.
릴리스는내턱을잡았다.
“그러니까다른년들이다가오지못하도록…내거라는표시를남겨둬야겠어.”
“리,릴리스.잠깐-”
릴리스의머리카락이튀어나와양손과양발을움직이지못하도록붙들었다.
“걱정마.나도조금은양보해서눈에띄는자국은남기지않을게.그러면남은건……냄새일려나?”
릴리스가내손을잡아올렸다.
카리사가잡았던손이었다.
그손에코를가져가냄새를맡은릴리스.
“…그년냄새가나.”
그순간처음으로릴리스의표정에변화가생겼다.
릴리스의눈이소름돋는핏빛으로빛나기시작했다.
가까이다가오는릴리스에게서흘러나오는강렬한압박감이나를꼼짝도못하게만들었다.
입술이맞닿기직전,릴리스가작게속삭였다.
“전부내냄새로덮어줄게.사랑해,아서.”
쪽
—-
같은시각,파티가한창벌어지고있는홀.
입구가가까운곳에한여학생이서있었다.
그녀는누군가와맞잡았던손을빤히내려다보았다.
천천히손을들어올린그녀는손을코에대고냄새를맡았다.
“킁킁…역시.”
여학생은고개를끄덕였다.
자신의추측이맞았다는사실에그녀는기쁜마음을감출수없었다.
“찾았다.”
그녀의밤색눈이반짝였다.
“밤의여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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